+지식인은 한 사회를 구성하는 동시에, 사회 기반을 위한 축들이다. 지식인의 존재는 존재 자체로 안정적 지표의 역할을 한다. 지표는 그 자체가 가고 있는 방향이자 흐름이 된다. 물이 어디인지 돌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다수 구성원들의 방향을 지표하며, 그리고 돌다리를 건너기 전에 그 돌의 안정성에 대해서 말해주는 이들이다. 그것은 지식인 본인이 갖고 있는 사회적 책임감 이전에, 한 사회에서 그에게 부여하는 역할에 가까운 것이다. 예술가가 이미 강 너머로 아스라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달려가고 있어야 한다면, 방향을 지표하고 있는 것은 지식인들인 셈이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흥미롭게 주목하고 있는 건, 그들이 (증오건, 혹은 박찬욱의 표현대로 복수이건) 정치권 인사 개혁 다음의 타겟이 '할 말하는 지식인'이라는 사실이다. 지식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방망이를 훨씬 직접적으로 맞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방망이의 존재 덕에 나는 지식인이 한 사회의 축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인지 눈으로 직접 "이해"하게 된 셈이다.
+은희경이었을 것이다. 독서가 자산이 되는 시기는 직접적으로 현실과 맞붙으면서였다는 표현을 썼던 이가. 언젠가부터 활자로 가득차 있던 책들이 두 종류로 나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활자인 책, 혹은 활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눈 앞에서, 혹은 이미 등 뒤에서 그들이 말했던 사유의 방식과 툴, 그리고 무기와 방향성들이 되었다. 대학 시절 온갖 레퍼런스들을 뒤져가면서 세미나와 끝나지 않는 토론들을 해도해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언어들이, 링겔로 수해받듯이 빨려들면서 몸에 섬세한 세포들과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시점이 되는 경험을 갖기 시작한 시점이 있었다. 동시에, 언어가 언어 그 자체로서 더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활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도 했다. 사유는 사유와 붙다가, 사유가 활자를 만나서 툴로 변환하기도 하며 시간과 경험으로 붙어 삶이라는 덩어리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그 폭들은 조금 퇴색되기도 혹은 더 예민한 형태로 다채로워지기도 했다. 활자들이 현실과 붙어나가는 것들은 개인적이기도, 사회적이기도 했다. 그 자체로 개인의 삶이자, 역사이기도 했다.
활자들과 사유의 틀들이 배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배치는 수학이다. 누구였더라, 자신의 언어는 99%가 타인의 언어라고. 활자를 배치로만 이해하기에 철저히 자신의 언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태도는 언어적 천재이거나, 게으른 삶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활자를 대하는 태도엔 세 가지 태도가 있다. 삶과 몸 그 자체로 유산되는 언어들이 있으며, 활자 그 자체 내의 배치적 세계가 존재하며, 활자들을 삶으로 전환시키는 지독히도 성실한 삶들이 있다.
삶에서 유산되는 언어들은, 이미 해야 할 말이 정해져있는 이들이 기성화된 언어들을 빌어내건, 새로운 언어건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며, 이것은 예술가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이다. 활자 그 자체 내의 배치적 세계만이 존재하는 이들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엘리트들이 하고 있는 수학적 계산이다. 이들은 김병익의 표현을 빌어오자면,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이 "평면적"이다. 삶과 사회, 역사는 입체이고 2차원 이상이기 때문에 이 도식적 평면들과 맞붙었을 때 평면성의 협소한 인식의 틀부터 깨져가며 그 폭이 다른 형태로 전환할 수 밖에 없다. 활자들을 삶으로 전환시키는 지독히도 성실하고 실천적인 삶은 삶 자체를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새로운 언어들을 재-생산시킨다.
배치란, 이 세 가지 태도가 모두 혼재될 때 가능하다. 예술의 Originality이건, 한 개인, 혹은 사회가 "현재 앞의 시간"을 가는데 필요한 방향의 지표는 이 혼재의 재요리 위에서 최소한의 자양분을 가진 채 태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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