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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25 +블로그 이전.
- 2009/06/23 지식인. 그리고 활자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단상.
- 2009/06/21 아방가르드의 두 가지 이념.
- 2009/06/19 +
- 2009/06/16 칼날.
- 2009/06/14 피부 수칙.
- 2009/06/12 대운하, 촛불, 민족주의, 그리고 예술계 자율에 관한 잡상.
- 2009/06/11 문화예술의 자율성 회복을 위한 미술인 성명
- 2009/06/07 진정한 프랑스인.
- 2009/06/07 후불제 민주주의
+지식인은 한 사회를 구성하는 동시에, 사회 기반을 위한 축들이다. 지식인의 존재는 존재 자체로 안정적 지표의 역할을 한다. 지표는 그 자체가 가고 있는 방향이자 흐름이 된다. 물이 어디인지 돌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다수 구성원들의 방향을 지표하며, 그리고 돌다리를 건너기 전에 그 돌의 안정성에 대해서 말해주는 이들이다. 그것은 지식인 본인이 갖고 있는 사회적 책임감 이전에, 한 사회에서 그에게 부여하는 역할에 가까운 것이다. 예술가가 이미 강 너머로 아스라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달려가고 있어야 한다면, 방향을 지표하고 있는 것은 지식인들인 셈이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흥미롭게 주목하고 있는 건, 그들이 (증오건, 혹은 박찬욱의 표현대로 복수이건) 정치권 인사 개혁 다음의 타겟이 '할 말하는 지식인'이라는 사실이다. 지식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방망이를 훨씬 직접적으로 맞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방망이의 존재 덕에 나는 지식인이 한 사회의 축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인지 눈으로 직접 "이해"하게 된 셈이다.
+은희경이었을 것이다. 독서가 자산이 되는 시기는 직접적으로 현실과 맞붙으면서였다는 표현을 썼던 이가. 언젠가부터 활자로 가득차 있던 책들이 두 종류로 나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활자인 책, 혹은 활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눈 앞에서, 혹은 이미 등 뒤에서 그들이 말했던 사유의 방식과 툴, 그리고 무기와 방향성들이 되었다. 대학 시절 온갖 레퍼런스들을 뒤져가면서 세미나와 끝나지 않는 토론들을 해도해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언어들이, 링겔로 수해받듯이 빨려들면서 몸에 섬세한 세포들과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시점이 되는 경험을 갖기 시작한 시점이 있었다. 동시에, 언어가 언어 그 자체로서 더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활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도 했다. 사유는 사유와 붙다가, 사유가 활자를 만나서 툴로 변환하기도 하며 시간과 경험으로 붙어 삶이라는 덩어리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그 폭들은 조금 퇴색되기도 혹은 더 예민한 형태로 다채로워지기도 했다. 활자들이 현실과 붙어나가는 것들은 개인적이기도, 사회적이기도 했다. 그 자체로 개인의 삶이자, 역사이기도 했다.
활자들과 사유의 틀들이 배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배치는 수학이다. 누구였더라, 자신의 언어는 99%가 타인의 언어라고. 활자를 배치로만 이해하기에 철저히 자신의 언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태도는 언어적 천재이거나, 게으른 삶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활자를 대하는 태도엔 세 가지 태도가 있다. 삶과 몸 그 자체로 유산되는 언어들이 있으며, 활자 그 자체 내의 배치적 세계가 존재하며, 활자들을 삶으로 전환시키는 지독히도 성실한 삶들이 있다.
삶에서 유산되는 언어들은, 이미 해야 할 말이 정해져있는 이들이 기성화된 언어들을 빌어내건, 새로운 언어건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며, 이것은 예술가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이다. 활자 그 자체 내의 배치적 세계만이 존재하는 이들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엘리트들이 하고 있는 수학적 계산이다. 이들은 김병익의 표현을 빌어오자면,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이 "평면적"이다. 삶과 사회, 역사는 입체이고 2차원 이상이기 때문에 이 도식적 평면들과 맞붙었을 때 평면성의 협소한 인식의 틀부터 깨져가며 그 폭이 다른 형태로 전환할 수 밖에 없다. 활자들을 삶으로 전환시키는 지독히도 성실하고 실천적인 삶은 삶 자체를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새로운 언어들을 재-생산시킨다.
배치란, 이 세 가지 태도가 모두 혼재될 때 가능하다. 예술의 Originality이건, 한 개인, 혹은 사회가 "현재 앞의 시간"을 가는데 필요한 방향의 지표는 이 혼재의 재요리 위에서 최소한의 자양분을 가진 채 태어날 수 있다.
아방가르드 개념은 모더니즘적 비전에 알맞고 이 비전에 따라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연결시키는데 적합한 주체의 유형을 규정한다. 그 성공은 아방가르드 개념이 혁신에 대한 예술적 이념과 정치적 운동 방향의 이념 사이에 제안하는 편리한 연결보다는, 그 개념이 "아방가르드"의 두 이념들 사이에서 단행하는 더 은밀한 연결과 관계가 있다. 운동을 이해하고 그 힘들을 구체화하고 역사적 변화의 방향을 규정하며 주체적인 정치적 방향설정들을 선택하는 힘, 선두에서 걷는 힘의 지형학적, 군사적 개념이 있다. 간략히 말해서, 정치적 주체성을 어느 일정한 형태-역사적 기호들을 읽고 해석하는 그 능력으로부터 그 지휘 능력을 끌어내는 선발대인 당-에 연결시키는 이러한 개념이 있다. 그리고 쉴러의 모델에 따라, 미래에 대한 미학적 예상 가운데 뿌리를 두는 아방가르드의 이러한 다른 개념이 있다. 아방가르드 개념이 미학적 예술 체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이다. 정치를 삶의 총체적 프로그램으로 변형시키면서 "미학적" 아방가르드가 "정치적" 아방가르드에 가져온 것, 또는 미학적 아방가르드가 정치적 아방가르드에 가져오길 원했고 가져왔다고 믿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정당들과 미학 운동들 사이의 관계들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실상 정치적 주체성의 두 가지 다른 이념들로 되어있는, 아방가르드의 이 두 가지 이념들 사이에서, 어떤 때는 스스로 만족하여 유지되었고 다른 때는 격렬하게 고발되었던, 어떤 혼동의 역사다. 그러나 이 혼동은 전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날의 억견doxa처럼 감성의 총체적 혁명에 대한 예술가들의 요구들이 전체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이념 자체가 아방가르드의 미학적 개념과 전략적 개념 사이에서 분할되는 것이다.
<감성의 분할_미학과 정치> 2. 예술 체제들에 대하여, 그리고 모더니티 개념의 결점에 대하여, 자크 랑시에르
+나경원의 예쁜 패션 화보를 쳐다보다가, 정치인도 외모의 힘은 무시할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을 문득. 하여간 나경원은 그 기이한 행보와 발언에도 불구, 일단, 그 얼굴을 찾아보게 된단 말이지. 여성 대통령이 한국에 나올 확률에 대해서 아는 어른과 얘기를 했다. 한명숙, 강금실, 박근혜...줄줄이 얘기하다가, 아주머니, 강금실은 절대 안되신단다. 이유는 외모가 촉새마냥 여우처럼 생겼다나? 이건 또 나름대로 외모 역차별. 발끈한 나, 이명박도 되는데요. 그 얼굴 어디가 대통령 할 것처럼 생겼단 말여요. 노무현은 만화주인공처럼 생기기라도 했죠. 그러니 아주머니 왈, 이명박은 박정희를 닮았잖아.
헉. 80년대생은 절대 알 수 없던 이명박 얼굴의 비밀.
+칼날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의 칼날같은 상처가 전이되었다. 몸이 베인 듯한 기분이다.
+이택광 교수의 라깡 독회를 다니고 있다. 정신분석의 네가지 개념을 읽고 있는데, 무의식의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라깡은 말한다. 우울증이란 낫는 것 같더라도 계속 어떤 방식으로건 신체적 징후로라도 남기에, 애초부터 낫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비관적이다. 이런 인식론은 삶이 그저 깨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조심조심 살아야 하노라고 말하는 것 같다. 상흔은 사라지고 퇴색되며 기억은 재조작기도 한다. 그렇다면 흉터는 파편이 되어 둥둥 떠다니게 되나. 뭐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책을 읽고 있다.
+개인적인 상흔을 비추는 거울로서 작업을 바라볼 때면, 그 작업이 한 개인에게 절름발이처럼 보일 때가 있다. 사건의 상처가 흉터가 되고 상흔이 되면 그것은 하나의 징후로 남는다. <여교수의 은밀한 사생활>이란 영화가 있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여 교수의 절뚝거림을 징후로 남겼다. 영화 초반에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그 절뚝거림이 그녀를 더 섹시하게 만든다고. 영화 <인터뷰>에선 남자가 매력적으로 보일 땐 "scar"라지 않던가. 섹시한 무의식의 흉터. 이 두 코드를 설명하기엔 베이컨의 작업이 쉬울 것 같기도 하다. 하여간, 한국 사회는 칼날 같은 노무현의 추락으로 섹시해지고 있다.
+정신분석학은 여전히, 읽기 꽤 무섭다. 후기구조주의는 예술작품을 설명하기에 위험하면서도 여전히 매력적이고,(섹시해서 그럴까?) 어떻게 보면 쉬운 분석 틀이다. 솔직히, 인간이 무의식을 갖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무의식이 되도록 생겨먹었기에 무의식일텐데 굳이 칼날을 들이대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최근 분명한 학문적 목표들과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현실적 진로가 명확하지 않다. 걸림돌은 작업, 시간이나 용이함 그런 것들이다. 책을 내는 것도 방법인데, 시작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럴 때면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편이 편할 것이란 생각도 든다.
+블로그를 이전할까 생각 중이다. 조용하고 편해서 좋기는 한데, 호스팅의 압박 때문에 고민 중이다.
그 외.
+내가 지지부진하게 길게 쓴 걸, 박찬욱이 간단하게 쓴 걸 읽었다. 그 사람들(뉴라이트 인사들) 진보, 아방가르드 개념과 좌파를 혼동하는 거 아니냐고. 대안공간 시스템 전반도 빨갱이로 지목하고 있다던데, 현재 문화 예술계에서 빨갱이로 지목된 타겟은 그렇게 설명하면 된다. 요즘 독재인가 아닌가 논쟁이 돌던데, 소리없이 조용하게 움직여서 그렇지, 독재인 건 맞다. 앞으로 남은 정권 3년 이내에 사람이 더 죽어나가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문화 예술계가 현 정권에 대응하는 방법엔, 피부 관리 수칙이 필요하다.
-막기는 힘들다.
-그러나 최대한 늦추거나 최소화해야 한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710472&hisBbsId=total&pageIndex=2&sortKey=regDate&limitDate=-30&lastLimitDate=
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view.html?cateid=1018&newsid=20070725173608218&p=new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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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 뒤적이다가 이런 글을 봤다. 대운하에 목숨걸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부동산. 대운하 파려는 이유를 청계천 만들려는 이유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허탈해진다. 하긴, 청계천도 대선 노리고 진행시킨 것이긴 하지. 욕망에 지독히도 충실하긴 하다. 도곡동 땅의 실제 주인은 정주영 아저씨란 말도 있던데. 서울시 곳곳 나붙은 재개발 문제를 보면 관련되어 있는 삼성이고.
촛불 인디포럼에 다녀올 때, 발제자들이 계속 그 질문을 했었다. 도대체 촛불이 왜 용산에는 오지 않았을까-.
촛불을 기억해보면, 촛불은 민족주의의 발현이 시작이었다. 기존 운동권이 민주화 투쟁에 목숨을 걸던 세대라면, 촛불은 민족주의의 정서에서 시작되었다. 반미 정서를 자극했던 미선이 효순이 사건, 붉은 악마에서 촛불이 시작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연아에 열광하는 이유도, 한국 야구가 보기 드문 성적을 거두었을 때, 깃발 꽂고 오는 신에 열망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드물게 반드시 가져야 할 사회적 인식으로 각인되어 있는 절대적 선이다.
내 자식에게, 혹은 군에 가 있는 내 남자친구에게 쇠고기를 먹일 수 없다는 사회를 인식하는 방식은, 남자들이 페미니즘을 이해할 수 있으려는 최대한의 상상력의 범위. 내 여자친구가 혹은, 내 딸이 누군가에 의해서 강간당하는 폭력으로서 인식하는 방식과 별 차이 없을 것이다.
용산 사태는 용산 철거민 VS 재개발 정권과 삼성 건설이었다. 노동문제이지, 민족주의를 자극하지 않는다. 게다가 삼성은, 한국 사람들의 욕망의 기표아니던가. 당시 이태원 어떤 술자리에서 한 사람은 용산 참사에 대해서 욕망의 충돌이라고 표현했었다.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낭만적인 표현이자, 현실적인 표현이다. 상대적 기준에서 가난하다고 볼만한 노동자들 조차도 노동자들이라고 스스로 인식하고 싶어하지 않으니 말이다. 노동과 진보는 그저, 엘리트들을 위한 이상주의 사회일지도. 운동권의 욕망이 세대 교체를 이뤘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 세대는 비민주화 세대라는 것에 대한 경험이 직접적이진 않았었기 때문이다.
노회찬의 낙선이 이미 입증했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이 어디 서있는가에 대한 기표가 아니다. 욕망의 방향성과,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성의 기표의 문제이다. 방향성이란, 의지에 따라 3초면 고개를 돌릴 수 있는 것이다.
88만원 세대라며 20대를 동정했던 우석훈에게 한 20대 블로거가 거침없이 쏟아냈던 한 문장이 기억이 난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동정어린 현실 인식이 아니라, 한 알의 달콤한 마취제라고. 적어도, 같은 20대로서 짱돌을 들라던 우석훈의 말보다는 불안 앞에서 더 절절한 호소력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한국 교회가 힘을 발현하는 이유일 것이다. 과연 지금 시대에 민주화라는 것, 투쟁이라는 것. 마취제 한 알보다 얼마만큼이나 필연적으로 인식하고 힘을 갖고 움직일 수 있을까. 회의적이고, 무력하다.
촛불이 서울광장에 모인다는 말을 듣자마자, "탄핵" 때 학습한 적이 있는, 보수세력들, 그 날로 결집해서 마치 같이 협공하듯이 반정권적 노선으로 돌아섰다는 뉴스가 떴다. 그들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선 자신들의 원칙이건 뭐건, 어디든 쳐넣어 놔도 상관없이 뭐든 다 하는 "권력을 쥔" 아귀들이다. 이런 인간들 보면 차라리 박근혜가 낫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알게 된다. 저런 인간들을 상대로 무기력해지지 말아야, 말았어야 한다는 것을.
언제 한 번은 이글루에서 그런 포스팅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는 것은, 조선일보가 투표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유도하는 정치적인 전략이라고. 이명박이 대선에 당선된 과정이기도 했다.
+요즘 생각이 많아져서 글이라도 잔뜩 써놓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 체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둔화시키려고 그리 노력했는데, 사건이 많아지면서 다시 예민해졌다. 체력이 저하될 때 주변에 폐를 끼치는 것도 싫고, 한 번 앓고난 후 건강 염려증 따위도 생겼다. 이 블로그로 이사온 가장 큰 이유가 사회 정치 포스팅을 최소화하자였더랬다. 그에 대해 걱정해주는 친구들의 애정어린 조언이란, 뉴스 보지 마라-다. 그런데 정말로, 너무들, 아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번 호 씨네 21보면 전부 정치얘기 밖에 없어서 영화 좋아하는 내 친구는 정치 얘기밖에 없다고 투덜대던데, 민주화 담론이나 시국성명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당장의 자기 소리를 내도 밥그릇 다 뺏기게 생긴 미술계는 현 상황에 대한 담론들로 도배를 해도 모자랄 판에, 지독히도 미학적이고 평화롭게 침묵하신다. 박정희 정권 1979년까지, 아파트에 걸리면 잘 어울릴 그림을 그려주며, 예술과 정치가 아무 관계 없는 척하던 모더니티의 중립적인 척하던 태도를 기억해보면 역사가 30년 만에 그대로 반복되는 꼴이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건, 이 무력하고 패배적인 침묵들이 전염성을 띈다는 것이다.
+"한 국가가 개인의 발전을 방해한다면, 국가는 영원히 개인에게 빚을 진 것이다"
이 멋진 말을 한 인간이 이명박이란다. 지금 미술계가 그대로 돌려줘도 될 표현이다.
상상력에 자유를! - 문화예술의 자율성 회복을 위한 미술인 성명
서명운동이라.
지금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앞으로 남은 3년동안 서울 시내 미술관과 미술대학 다 사라지지 않을까 했습니다. 미술계는 지금 가장 급박하게 움직여야 할 곳이었는데 말이죠. 여기저기 싸울 일이 산재하군요.
인미공. 아르코. 한예종. 이 정권 들어서고, "진보"와 "전위"란 무슨 뜻인가를 현실적으로 실감할 만 합니다.
...나는 깔깔대고 웃고, 휘파람을 불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포도주와 나의 이십 세가 내 삼륜차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세상은 내 것이었다. 나는 페달을 밟아, 빛과 별의 파리를 가로질러 달렸다. 나는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핸들을 놓고, 팔로 허공을 치며, 차에 타고 있는 혼자인 여자들에게 키스를 던지면서, 나는 빨간 불을 무시해버렸다. 한 경관이 분개한 호각 소리로 나를 세웠다.
"뭐야, 도대체?" 그가 고함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장난치며 말했다. "인생은 아름다워요!"
"그렇다면 가시오!" 하고 진정한 프랑스인으로서, 그 암호에는 어쩔 수 없었던지, 그가 내게 소리쳤다.
새벽의 약속, 로맹 가리.
+후불제 민주주의. 유시민.
:노무현 서거 직전에 출간된 책. 생각보다 이렇다 할 내용은 별로 없다. 그저 몰랐던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 영어 몰입 교육 논란은 미국 유학 시절 영어 발음 대문에 어려움 겪었던 분들이 권력을 손에 넣자 그런 방식으로 자기들의 트라우마를 표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헌법 10조 행복추구권 조항은 전두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유신헌법은 조잡한 습작이 아니었다. 그 세련된 터치를 보면 전문가의 솜씨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이 '아름다운 독재의 폐쇄회로'를 디자인한 이는 누구였을까? 유신헌법은 두뇌는 명석하나 심성은 혼탁한, 명문대학 출신의 법률 전문가들이 만들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좋게 보면, '인격적 철인'이고 나쁘게 보면 '제도화된 괴물'이다.
:유시민은 이명박 정권의 탄생을 대한민국이 성공은 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문명역주행이 일어났다고 진단한다. 진상 몽상가답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얘기는 아니다. 사회 서적이면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반즘은 개인 회고록에 가까운 이 책을 읽다보니, 나는 '우리가 이 땅에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난 존재.."를 읊지 않고 자란 세대라는 것을 처음 인식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나는 행복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헌법이 존재하는 시대에 자랐다. 이땅에 태어날 때 분명한 사회적 목적을 갖고 태어난 그들과 사회적 존재 이유부터 다른 셈이다. 아무래도 요즘 오랜만에 세대론에 관한 관심이 회귀 중.
:대선 후보에 지지율 1위가 박근혜고, 지지율 2위가 유시민이 되었다. 뉴스에 내내 뜨고 진보 인터넷 매체에 매일같이 메인을 장식하던 유시민의 울던 예쁜 얼굴. 연민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그와 닮았단 이유로 가장 많은 정치적 수혜를 입을 사람으로 부각될 예상도 했다만. 헤어스타일 한 번 수십년 동안 바뀌지 않는 박근혜에 이어 유시민까지. 이 나라 정치가 점점 연민에 의해 좌우되어 가는 이유가 뭘까.
덧. 동네 블로그 돌아다니다가, 읽은 효라님의 베르사이유 패러디. 읽다가 너무 웃겨서 멋대로 링크함.
뮹바끄 앙뜨와네뜨의 하루 1화
http://blog.naver.com/redrosa1/30048838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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